기관·개인 `블랙스완` 덫에 걸렸다
매일경제 2010.11.15 17:49
옵션만기일인 지난 11일 오후 2시 45분. 증시에는 아무런 이상 징후가 없었다. 옵션 만기일에는 오후 2시 45분까지 프로그램 매매 예정 물량을 공시해야 하는데 마감 15분 전까지 별다른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큰 변동 없이 증시가 무난하게 끝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1분 후 상황이 갑자기 바뀌었다. "이번 증시도 대규모 청산 없이 다음달로 롤오버되겠구나"하고 대부분의 시장 참여자들이 생각하는 순간 이상 징후가 포착됐다. 도이치증권 창구에서 무려 1조5000억원의 대량 매도 주문이 신고된 것이다.
◆ 사전 준비 없으면 불가능 = 이날 증시를 패닉 상태로 몰고간 것은 프로그램 매수차익 잔액 청산 물량이었다. 매수차익거래 기본 원리는 고평가된 선물을 팔고 저평가된 현물을 매수해 그 가격 차이에서 이익을 얻는 것이다.
당초 파생 전문가들은 11일 프로그램 매수를 기대했다. 선물 가격이 고평가되고 현물 가격이 낮은 '콘탱고' 상태가 지속됐기 때문이다. 선물이 고평가돼 있기 때문에 선물을 팔고 현물을 사들이는 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선물이 고평가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도 포지션을 잡아 놓은 선물을 사실상 매수(정확히는 합성선물 매도+선물 매수+현물 매도)하며 현물 주식을 대량으로 매도했던 것이다.
배당시즌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점도 만기 연장에 힘을 실어준다. 현물을 지금 바로 매도하지 않고 들고 있으면 연말 배당수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말해 이날 현물 매도는 상식적인 행동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파생 전문가들은 이날 거래는 미리 두 가지가 준비돼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거래라고 보고 있다. 실익 없는 청산에 상응할 만큼 이익이 있어야 한다. 첫 번째 이익을 볼 수 있는 부분은 환차익이다. 이날 시장에 매도 쇼크를 준 주체가 추가적인 원화값 상승이 주춤할 것으로 보고 그동안 원화값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시기에 매수했던 주식을 팔아 환차익을 봤다는 말이다.
도이치증권 계좌는 이런 준비를 미리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도이치증권이 본격적으로 매수차익 잔고를 늘리기 시작한 것은 원ㆍ달러 환율이 1200원대이던 지난 6월부터이고 이후 꾸준히 늘려왔다.
또 하나는 A펀드가 매수차익거래 청산에 앞서 풋옵션까지 걸어놨을 가능성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국거래소가 15일 조사에 들어갔다. 이와 관련해 거래소 관계자는 "옵션 연계거래가 불법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들 거래의 의도성을 살피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인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 "블랙스완 상황이었다" = 이번 사고의 최대 피해자는 와이즈에셋자산운용이다. 와이즈에셋자산운용은 '풋옵션 매도' 포지션을 취했다가 900억원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 와이즈에셋자산운용이 '풋옵션 매도 포지션'을 취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풋옵션 매도자는 주가가 상승해 풋옵션 매수자가 권리를 행사하지 않을 경우 미리 약정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또 주가가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움직여도 손실을 보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지수가 예측 가능한 범위를 벗어나 떨어질 경우 풋옵션 매수자가 행사한 권리(팔 권리)를 무조건 받아줘야 하기 때문에 손실이 무한대로 늘어날 수가 있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지수가 50포인트 이상 떨어진다는 것은 당시 증시 상황에서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거래소 관계자는 "이번에 프로그램 대량 매도를 한 주체는 '블랙스완'과 같은 상황을 만들었고 국내 기관들은 '블랙스완'의 덫에 걸렸다"고 평가했다.
[남기현 기자 / 김기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