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손익계산서
국제관계 2012. 8. 26. 20:59<출처:오늘의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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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 앞서 반말체 인것을 아무쪼록 양해 부탁드립니다, 수정하기는 시간이 좀 그래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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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우리를 구해주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 54년 어느 세미나에서-
신이 내린 선물
-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 총리, 한국전쟁에 대해서-
사회사 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의 글이지만 이러한 글을 이어서 쓰기 앞서 한국전쟁으로 참전 당사국들이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따져보도록 하자.
그들 모두 공식적인 담론으로 나름대로 성과를 얻었다는 자부하는 한국전쟁의 실제 손익계산서에서 가장 큰 이득과 손해를 본 쪽은 어디일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전쟁 기간 중 전 세계는 2차대전 이후 첫 번째 호황경기를 누렸다.
전쟁의 발생은 자국의 영토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물자의 소모로 생산과 소비가 증가되고 군사인력과 왕성 해진 경제활동으로 실업이 감소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전쟁은 2차대전 이후 다시 침체되기 시작하던 세계 경제에 새로운 돌파구가 되었다.
1.미국의 경우: 막대한 경제적 이익, 위신손상과 고질병의 시작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공식적인 담론은 ‘부당한 공산침략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과 십자군 정신으로 참전했고 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결국 대한민국을 지켜냈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과 발전에 기여했다’ 지만, 당시 미국은 북한정권의 전면전 기도를 분명 알고 있었다. 정말 대한민국의 안전을 염려했다면 전쟁 발발직전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의 성명서 하나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었다. 가장 큰 수혜자는 미국 경제였고 그 다음은 2차대전의 종전으로 대폭의 예산삭감과 군 병력의 감축이 불가피했으며 과잉 생산된 군수물자의 재고부담을 안고 있었던 미 군부(특히 육군)였다. 맥아더의 고백처럼 한국은 미국을 구해주었다.
한국전쟁을 통해서 미국은 2차대전 못지않은 또 한번의 경제호황기를 누렸다.
니츠가 작성한 NSC 68 문서는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에 대한 예상수익 계획서나 마찬가지였다. 50년 180억 달러의 수준이었던 미군의 국방예산은 한국전쟁이 끝난 53년 무렵에는 2차대전수준인 500억 달러로 회복됐고 이후 지속된 미 소간 냉전을 이유로 막대한 예산을 의회로부터 승인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최근 밝혀진 자료에 근거해도 20세기 미국이 치룬 전쟁 중 2차대전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전비를 쓴 전쟁이 한국전쟁이라는 점에서 미국은 한국전쟁을 철저하게 자신들의 경기부양과 국방예산 증강을 통한 군부의 위상강화로 활용했다.
그러나 자존심과 위신에는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먼저 미군 사상 최초로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라는 초강대국답지 못한 좌절을 겪었고 미 육군은 일본군보다도 한참 수준이 떨어진다고 평가되던 아시아의 3류(?)군대 중국에게 미 육군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했다.
또한 사실상의 무제한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으로 전 북한지역을 초토화하여 2차대전 때도 볼 수 없었던 너무도 지나친 민간인 살상과 파괴를 자행, 세계여론의 빈축을 샀다.
특히 유럽지역에서의 미국의 외교적 위신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적지 않은 손상을 입었다.
가장 심각한 후유증은 2차대전과 한국전쟁을 통해서 미국의 군산복합체 산업구조가 고착화되면서 주기적으로 전쟁을 통한 경기부양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베트남전과 90년대 걸프전, 최근의 이라크 침공은 바로 한국전쟁 으로 굳어진 미 군산복합체구조의 전쟁중독 증세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냉전의 종식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전쟁중독증세와 전쟁특수로 인한 특정 업체들과 군부의 이익 챙기기는 21세기 들어서도 여전히 세계평화의 중대한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
2.중국의 경우: 주권수호에 성공, 대만문제 등 적지 않은 외교적 손해발생
중국이 북한을 도왔던 원인에는 수십 년 동안의 항일투쟁과 국공내전 기간 중 북한 정권과 조선인들의 헌신적인 희생과 도움, 적지 않은 출혈에 대한 보은의 성격과 그간의 끈끈했던 관계성도 작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한 국가의 생존과 국익 앞에서 이러한 요소는 부차적인 것 일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을 도왔다.
사실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출범한지 1년도 되지 않았던 신생 공화국 중화인민 공화국의 입장에서 참전은 다소 무리한 측면이 없지 않다.
당시 중국 지도부내에서도 참전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았던 상황에서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패권 장악이 신생공화국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점을 의식하여 결국 참전을 강행하였고 그런 측면에서 중국은 적지 않은 정치적인 성공과 군사적 성공을 동시에 거두었다.
같은 공산주의 형제국인 북조선 인민공화국과의 의리와 미 제국주의의 침략분쇄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세웠지만 그들 역시도 과거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외교 안보적 기본사고 틀이었던 순망치한(脣亡齒寒) 논리의 연장선에 서 있었다.
열세의 화력과 장비, 보급능력에도 불구하고 중국군 지휘부는 초강대국 미군의 약점을 정확히 분석하여 역이용한 탁월한 전술과 작전으로 멸망직전에 놓였던 북한 정권을 단숨에 구하면서 화려하게 세계사의 무대에 신고식을 치렀고 단숨에 극동 아시아에서의 새로운 강자로 부각된다.
신생공화국의 주권과 영토 그리고 정치적인 위상을 높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참여로 대만과의 통일기회를 사실상 놓쳐버렸고 그로 인한 부담은 지금도 여전히 대륙정권의 고민으로 남아 있다. 또한 오랜 내전으로 인해 피폐된 인민들의 삶을 위한 내실 다지기의 기회 역시 상실했다. 한국전쟁으로 중국인민들의 삶은 더욱 고달파졌고 고통스러워졌을 뿐이다.
중국의 참전은 신생 중화인민 공화국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렸지만 외교적 손해도 적지 않았다. 특히 미국과의 전쟁으로 인한 관계악화는 이후 20년 동안 세계 외교무대에서 중국에게 걸림돌로 작용했다.
당시에도 시급했던 외교과제 중 하나였던 미국과의 관계개선은 커녕 악화일로의 길을 자초한 셈이다. 이미 강대국가였지만 유엔 등에서 중국이 강대국다운 대접을 받게 된 것은 70년대 초 미국과의 관계를 회복한 후에나 가능했다.
3.소련의 경우: 노회한 국익 챙기기에 성공, 큰 손해 없이 안전운행
북한의 전면전 준비를 도와준 장본인이자 후견인이었고 북조선 인민공화국 창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소련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특별히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다.
애초부터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그토록 역설했던 한반도의 분단극복을 위한 통일전쟁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그저 한반도의 전쟁이 미국과의 전면전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한국전쟁 전면에 나서기를 극도로 꺼려했다.
소련은 미국에게 필사적으로 전면전을 할 의사가 전무하다는 의중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런 측면에서 그들은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50년 가을 김일성정권이 존폐의 위기에 몰렸을 때조차도 소련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하여 아예 북한에서 손을 뗄 궁리부터 했고 이후 전황이 역전되자 이번에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조기 휴전보다는 중국에게 지속적인 전쟁수행을 배후 교사하는 등 노회하게 자국의 이익추구에만 몰두 했을 뿐이다.
북한에 공급했던 상당수의 군사 장비와 물자 역시 구상무역을 통해서 적지 않은 수입을 챙겼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소련의 이율배반적 행태는 전후 북한에서의 점차적인 영향력 상실로 이어졌다. 먼저 북한은 그 어느 때보다 중국과 가까워졌고 북한정권 내에서 권력의 한축을 담당했던 소련출신 한인계는 급속도로 몰락했다.
또한 중국의 급속한 부상으로 결국 사회주의권에서의 독보적인 위치를 위협받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50년대 후반 중소간의 분쟁과 대립으로 격화된다.
그러나 소련은 한국전쟁으로 북한과 중국이 감수했던 것과 같은 극심한 손해를 본 것은 없다.
4.일본의 경우: 최고의 수혜자, 구매하지도 않은 복권의 대박!
한국전쟁에 표면적으로는 참전하지도 않았고 외견상으로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일본이 한국전쟁에서 유일하게 혼자 막대한 이익만을 챙겼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역설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2차대전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고 패전국의 처지로 전락하여 종전 후 5년 동안 극심한 불경기와 이로 인한 사회혼란(일본 역시 좌우대립이 극심했음)으로 이후 전망이 매우 불투명했던 일본에게 한국전쟁은 기사회생의 기회를 제공했다.
미국이 한국전쟁 수행을 위해서 일본을 최적의 군수기지로 이용하면서부터 쏟아져 들어온 막대한 장비와 물자와 자금을 토대로 일본경제는 전후 첫 번째 호경기를 누렸다.
미군은 심지어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 사용될 귀순권유전단까지도 일본에서 인쇄주문을 맡길 정도였으니, 일본의 사실상 모든 산업이 한국전쟁 특수의 혜택을 톡톡히 입은 셈이다.
(만성무역적자에 시달리던 일본경제는 50년 바로 흑자로 돌아섰고 한국전쟁 특수로당시 화폐기준 총 24억달러의 어마어마한 수입을 올렸다. 전쟁 발발 1년만에 미국은 대일본원조를 중단했다)
특히 전쟁물자의 한국수송과 이미 보유하고 있던 공업기술력을 바탕으로 한반도에서의 전투로 파괴된 미군 장비의 수리창 역할까지 전담하게 되면서 부터 전쟁으로 피폐된 일본경제는 완전히 기사회생하게 된다.
50년 이후 10여년간 일본경제는 연평균 10%이상의 고성장시대를 구가했고 한국전쟁기간 중 축적된 한반도 정보인프라와 한반도에 대해 정통한 전문 인력을 미군에게 공급 하면서 패전국이 아닌 극동아시아 안보의 파트너로서 승격되는 부가적인 이득까지 챙긴다.
거기에 주일미군이 모두 한반도에 투입되면서 생긴 안보 의 공백을 채우고 이후 격화된 냉전을 이유로 사실상 군대를 완전히 폐지한 평화헌법에도 불구하고 자위대를 통한 재무장의 기회를 얻게 되는 최대의 정치군사적 이익을 얻었을 뿐 아니라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서 극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안보기지와 파트너로서의 위상을 감안한 파격적인 조건으로 패전국지위에서 벗어나는 외교적인 승리까지 거머쥐게 된다.
오늘날 일본이 패전국 독일에 비해서 불충분한 전후 처리에도 불구하고 다시 경제 강국으로 부상함과 동시에 재무장을 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면전에서 기원한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막대한 경제적 이익과 기대하지 않았던 정치,군사, 외교적 부수입까지 모두 얻어낸 한국전쟁 최고의 수혜자였다.
남북의 두 정권은 그들이 그토록 미워했던 일본에게 부흥과 재무장이라는 정말 주고 싶지 않았을 선물을 동족상잔의 내전을 통해서 고스란히 헌납했다.
5. 북한의 경우: 정권의 입지강화 성공 그러나 ... 너무 많은 상실
무모한 전면전시도로 사실상 전국토가 완전히 초토화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던 북조선 인민공화국이 전쟁을 통해 확실히 얻은 것은 국가의 형태를 채 갖추지 못한 연립정권으로 출발했던 김일성 정권이 전쟁 수행을 통해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점유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후에도 사소한 도전은 있었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후 지금까지 북한정권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얻은 것은 그 뿐이었다.
김일성 역시 한국전쟁의 수혜자그룹에 속한다. 한국전쟁이 없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그의 위상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먼저 분단을 극복하고자 결행했던 전쟁이었지만 이로 인해 분단은 더욱 공고해졌고 북한 정권은 도덕성 측면에서도 그동안 친일부역세력이 득세한 탓에 내심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자부했던 대한민국에게 이제는 동족 상잔의 내전을 도발 했다는 역비난을 듣게 되었다.
또한 일본이 식민강점기 북한지역에 건설했던 방대한 규모의 공업기반 시설과 사회 기반 시설 전부를 상실했고 극심한 폭격으로 인해 최소 이백만 이 넘는 민간인 사망자와 약 오십만의 전사자 최소 이백만에 이르는 월남 피난민들이 발생하여 극심한 전후피폐와 인력부족으로 이를 복구하는데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대외적으로는 극심한 국제적 고립을 감수해야만 했다. 한국전쟁을 통한 악감정의 축적은 미국과 최악의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는 이후 북한을 아직까지도 전사회의 병영화를 통한 군사국가로 만들었다.
전후 그들은 놀라운 잠재력을 발휘하여 경이로운 전후복구와 경제성장과 국력신장을 성취하여 70년대 초반까지 경쟁자 대한민국을 압도했지만 미국과의 대립은 결국 그들 성장의 한계와 걸림돌로 작용했고 이후 그들은 대한민국과의 체제경쟁에서 뒤쳐지고 만다.
군국주의가 극심했던 일본조차도 전쟁 마지막 해에만 유일하게 전체 GDP에서 군비의 비율이 30%수준을 넘었다. 그러나 지금 북조선 인민 공화국이 60년대부터 30년이 넘게 30%이상 수준을 유지해오고 있다는 사실은
현재의 북한이 얼마나 극심한 군사주의 국가이며 그들의 한계와 고민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해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민들의 삶이 개선 될 여지는 희박하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줄곧 희망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이를 수용할 의사가 없다는 데 있다.
한국전쟁의 뿌리 깊은 불신과 대립의 유산은 지금도 계속 북한을 짓누르고 있다.
6.남한의 경우: 오로지 잃었다.
한국전쟁 최대의 피해당사자중 한축인 남한은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
굳이 얻은 것으로 전쟁의 경험으로 인해 문학과 영화 등 예술분야의 소재가 풍성해졌다는 사실을 언급한다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북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완전했던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이 승만 정권과 친일부역 주류세력들은 나름대로의 정당성과 안정성을 얻었지만 이후 이러한 강요된 극우 냉전적 반공주의는 대한민국 자체가 표방했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근간마저 흔들어 버렸고 거의 40년의 세월동안 남한 역시 내재된 군사주의와 독재정치로 심각한 갈등과 분열의 양상을 겪어야 했다.
이를 극복하고 온전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까지 무수한 희생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나마 한국전쟁의 질서로 형성된 냉전독재정권이 아직까지 지속되지 않았다는 점은 다행한 일이지만, 한국전쟁의 유산으로 더욱더 깊어진 미국에 대한 의존도와 이후 남한 내 주류사회의 대미종속도는 일상화의 수준으로 정착되고 말았다.
물론 전쟁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억척스러움과 강인한 생명력이 이후 대한민국의 비약적인 경제발전과 번영의 밑바탕이 된 긍정적인 부분도 다소간 존재했지만, 전쟁을 통해서 상실한 것들과의 비교 자체가 불가능 할 정도로 전쟁의 상처는 깊고 크다.
먼저 한국전쟁 중 발생한 민간인학살과 폭격 등으로 전체 민족구성원 중 최소 10%~16%에 달하는 막대한 인명손실로 인해 한국전쟁으로 가족구성원 중 죽거나 다치거나 행방불명되지 않은 가구가 사실상 전무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5백만이 넘는 이산가족이 발생하여 아직까지도 망향의 그리움과 혈육을 잃어버린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7.한국전쟁 최대의 피해자: 우리 자신
이 사항은 남과 북 공히 공통된 사항이지만, 이토록 커다란 상처와 고통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은 각 해당구성원들에게 각 정권의 정체성과 공식담론에 의거한 한국전쟁의 피해만을 인지하고 말할 자유만을 허락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발생했던 자신들의 진정한 상처와 고통에 대해서 사실상의 침묵과 망각을 강요당한 것이다. 이 것은 심각한 의식의 단절과 왜곡 현상을 가져왔고 이후 한국전쟁을 통해 굳어질 대로 굳어진 민족분단을 더욱 더 악화시키는 유사 신앙적 의식으로 발전된다.
뿐만 아니라 더욱 고착화된 분단 구조는 지난 반세기 동안 남과 북 구성원 모두에게 막중한 군사비 부담을 부과했고 이로 인해 정상적인 국가라면 응당 돌아갔어야 할 기본적인 복지혜택마저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을 지속시켰다.
군복무의 부담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뜻을 펼쳐나가는 다른 세계의 젊은이들 이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여러 혜택이 없는 우리 청년들과 민족문화의 상실감과 그간의 손해 역시 깊고도 크다.
한국전쟁 최대의 피해자는 한민족 구성원인 우리 자신들이다.
우리는 이 끔찍했던 전쟁을 통해서 오직 상처와 피해만 입었다.
우리들의 손익계산서는 아직까지도 철저하게 적자상태다.
글을 시작하기 앞서 반말체 인것을 아무쪼록 양해 부탁드립니다, 수정하기는 시간이 좀 그래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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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우리를 구해주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 54년 어느 세미나에서-
신이 내린 선물
-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 총리, 한국전쟁에 대해서-
사회사 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의 글이지만 이러한 글을 이어서 쓰기 앞서 한국전쟁으로 참전 당사국들이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따져보도록 하자.
그들 모두 공식적인 담론으로 나름대로 성과를 얻었다는 자부하는 한국전쟁의 실제 손익계산서에서 가장 큰 이득과 손해를 본 쪽은 어디일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전쟁 기간 중 전 세계는 2차대전 이후 첫 번째 호황경기를 누렸다.
전쟁의 발생은 자국의 영토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물자의 소모로 생산과 소비가 증가되고 군사인력과 왕성 해진 경제활동으로 실업이 감소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전쟁은 2차대전 이후 다시 침체되기 시작하던 세계 경제에 새로운 돌파구가 되었다.
1.미국의 경우: 막대한 경제적 이익, 위신손상과 고질병의 시작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공식적인 담론은 ‘부당한 공산침략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과 십자군 정신으로 참전했고 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결국 대한민국을 지켜냈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과 발전에 기여했다’ 지만, 당시 미국은 북한정권의 전면전 기도를 분명 알고 있었다. 정말 대한민국의 안전을 염려했다면 전쟁 발발직전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의 성명서 하나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었다. 가장 큰 수혜자는 미국 경제였고 그 다음은 2차대전의 종전으로 대폭의 예산삭감과 군 병력의 감축이 불가피했으며 과잉 생산된 군수물자의 재고부담을 안고 있었던 미 군부(특히 육군)였다. 맥아더의 고백처럼 한국은 미국을 구해주었다.
한국전쟁을 통해서 미국은 2차대전 못지않은 또 한번의 경제호황기를 누렸다.
니츠가 작성한 NSC 68 문서는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에 대한 예상수익 계획서나 마찬가지였다. 50년 180억 달러의 수준이었던 미군의 국방예산은 한국전쟁이 끝난 53년 무렵에는 2차대전수준인 500억 달러로 회복됐고 이후 지속된 미 소간 냉전을 이유로 막대한 예산을 의회로부터 승인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최근 밝혀진 자료에 근거해도 20세기 미국이 치룬 전쟁 중 2차대전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전비를 쓴 전쟁이 한국전쟁이라는 점에서 미국은 한국전쟁을 철저하게 자신들의 경기부양과 국방예산 증강을 통한 군부의 위상강화로 활용했다.
그러나 자존심과 위신에는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먼저 미군 사상 최초로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라는 초강대국답지 못한 좌절을 겪었고 미 육군은 일본군보다도 한참 수준이 떨어진다고 평가되던 아시아의 3류(?)군대 중국에게 미 육군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했다.
또한 사실상의 무제한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으로 전 북한지역을 초토화하여 2차대전 때도 볼 수 없었던 너무도 지나친 민간인 살상과 파괴를 자행, 세계여론의 빈축을 샀다.
특히 유럽지역에서의 미국의 외교적 위신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적지 않은 손상을 입었다.
가장 심각한 후유증은 2차대전과 한국전쟁을 통해서 미국의 군산복합체 산업구조가 고착화되면서 주기적으로 전쟁을 통한 경기부양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베트남전과 90년대 걸프전, 최근의 이라크 침공은 바로 한국전쟁 으로 굳어진 미 군산복합체구조의 전쟁중독 증세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냉전의 종식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전쟁중독증세와 전쟁특수로 인한 특정 업체들과 군부의 이익 챙기기는 21세기 들어서도 여전히 세계평화의 중대한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
2.중국의 경우: 주권수호에 성공, 대만문제 등 적지 않은 외교적 손해발생
중국이 북한을 도왔던 원인에는 수십 년 동안의 항일투쟁과 국공내전 기간 중 북한 정권과 조선인들의 헌신적인 희생과 도움, 적지 않은 출혈에 대한 보은의 성격과 그간의 끈끈했던 관계성도 작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한 국가의 생존과 국익 앞에서 이러한 요소는 부차적인 것 일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을 도왔다.
사실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출범한지 1년도 되지 않았던 신생 공화국 중화인민 공화국의 입장에서 참전은 다소 무리한 측면이 없지 않다.
당시 중국 지도부내에서도 참전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았던 상황에서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패권 장악이 신생공화국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점을 의식하여 결국 참전을 강행하였고 그런 측면에서 중국은 적지 않은 정치적인 성공과 군사적 성공을 동시에 거두었다.
같은 공산주의 형제국인 북조선 인민공화국과의 의리와 미 제국주의의 침략분쇄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세웠지만 그들 역시도 과거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외교 안보적 기본사고 틀이었던 순망치한(脣亡齒寒) 논리의 연장선에 서 있었다.
열세의 화력과 장비, 보급능력에도 불구하고 중국군 지휘부는 초강대국 미군의 약점을 정확히 분석하여 역이용한 탁월한 전술과 작전으로 멸망직전에 놓였던 북한 정권을 단숨에 구하면서 화려하게 세계사의 무대에 신고식을 치렀고 단숨에 극동 아시아에서의 새로운 강자로 부각된다.
신생공화국의 주권과 영토 그리고 정치적인 위상을 높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참여로 대만과의 통일기회를 사실상 놓쳐버렸고 그로 인한 부담은 지금도 여전히 대륙정권의 고민으로 남아 있다. 또한 오랜 내전으로 인해 피폐된 인민들의 삶을 위한 내실 다지기의 기회 역시 상실했다. 한국전쟁으로 중국인민들의 삶은 더욱 고달파졌고 고통스러워졌을 뿐이다.
중국의 참전은 신생 중화인민 공화국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렸지만 외교적 손해도 적지 않았다. 특히 미국과의 전쟁으로 인한 관계악화는 이후 20년 동안 세계 외교무대에서 중국에게 걸림돌로 작용했다.
당시에도 시급했던 외교과제 중 하나였던 미국과의 관계개선은 커녕 악화일로의 길을 자초한 셈이다. 이미 강대국가였지만 유엔 등에서 중국이 강대국다운 대접을 받게 된 것은 70년대 초 미국과의 관계를 회복한 후에나 가능했다.
3.소련의 경우: 노회한 국익 챙기기에 성공, 큰 손해 없이 안전운행
북한의 전면전 준비를 도와준 장본인이자 후견인이었고 북조선 인민공화국 창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소련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특별히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다.
애초부터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그토록 역설했던 한반도의 분단극복을 위한 통일전쟁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그저 한반도의 전쟁이 미국과의 전면전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한국전쟁 전면에 나서기를 극도로 꺼려했다.
소련은 미국에게 필사적으로 전면전을 할 의사가 전무하다는 의중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런 측면에서 그들은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50년 가을 김일성정권이 존폐의 위기에 몰렸을 때조차도 소련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하여 아예 북한에서 손을 뗄 궁리부터 했고 이후 전황이 역전되자 이번에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조기 휴전보다는 중국에게 지속적인 전쟁수행을 배후 교사하는 등 노회하게 자국의 이익추구에만 몰두 했을 뿐이다.
북한에 공급했던 상당수의 군사 장비와 물자 역시 구상무역을 통해서 적지 않은 수입을 챙겼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소련의 이율배반적 행태는 전후 북한에서의 점차적인 영향력 상실로 이어졌다. 먼저 북한은 그 어느 때보다 중국과 가까워졌고 북한정권 내에서 권력의 한축을 담당했던 소련출신 한인계는 급속도로 몰락했다.
또한 중국의 급속한 부상으로 결국 사회주의권에서의 독보적인 위치를 위협받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50년대 후반 중소간의 분쟁과 대립으로 격화된다.
그러나 소련은 한국전쟁으로 북한과 중국이 감수했던 것과 같은 극심한 손해를 본 것은 없다.
4.일본의 경우: 최고의 수혜자, 구매하지도 않은 복권의 대박!
한국전쟁에 표면적으로는 참전하지도 않았고 외견상으로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일본이 한국전쟁에서 유일하게 혼자 막대한 이익만을 챙겼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역설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2차대전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고 패전국의 처지로 전락하여 종전 후 5년 동안 극심한 불경기와 이로 인한 사회혼란(일본 역시 좌우대립이 극심했음)으로 이후 전망이 매우 불투명했던 일본에게 한국전쟁은 기사회생의 기회를 제공했다.
미국이 한국전쟁 수행을 위해서 일본을 최적의 군수기지로 이용하면서부터 쏟아져 들어온 막대한 장비와 물자와 자금을 토대로 일본경제는 전후 첫 번째 호경기를 누렸다.
미군은 심지어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 사용될 귀순권유전단까지도 일본에서 인쇄주문을 맡길 정도였으니, 일본의 사실상 모든 산업이 한국전쟁 특수의 혜택을 톡톡히 입은 셈이다.
(만성무역적자에 시달리던 일본경제는 50년 바로 흑자로 돌아섰고 한국전쟁 특수로당시 화폐기준 총 24억달러의 어마어마한 수입을 올렸다. 전쟁 발발 1년만에 미국은 대일본원조를 중단했다)
특히 전쟁물자의 한국수송과 이미 보유하고 있던 공업기술력을 바탕으로 한반도에서의 전투로 파괴된 미군 장비의 수리창 역할까지 전담하게 되면서 부터 전쟁으로 피폐된 일본경제는 완전히 기사회생하게 된다.
50년 이후 10여년간 일본경제는 연평균 10%이상의 고성장시대를 구가했고 한국전쟁기간 중 축적된 한반도 정보인프라와 한반도에 대해 정통한 전문 인력을 미군에게 공급 하면서 패전국이 아닌 극동아시아 안보의 파트너로서 승격되는 부가적인 이득까지 챙긴다.
거기에 주일미군이 모두 한반도에 투입되면서 생긴 안보 의 공백을 채우고 이후 격화된 냉전을 이유로 사실상 군대를 완전히 폐지한 평화헌법에도 불구하고 자위대를 통한 재무장의 기회를 얻게 되는 최대의 정치군사적 이익을 얻었을 뿐 아니라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서 극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안보기지와 파트너로서의 위상을 감안한 파격적인 조건으로 패전국지위에서 벗어나는 외교적인 승리까지 거머쥐게 된다.
오늘날 일본이 패전국 독일에 비해서 불충분한 전후 처리에도 불구하고 다시 경제 강국으로 부상함과 동시에 재무장을 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면전에서 기원한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막대한 경제적 이익과 기대하지 않았던 정치,군사, 외교적 부수입까지 모두 얻어낸 한국전쟁 최고의 수혜자였다.
남북의 두 정권은 그들이 그토록 미워했던 일본에게 부흥과 재무장이라는 정말 주고 싶지 않았을 선물을 동족상잔의 내전을 통해서 고스란히 헌납했다.
5. 북한의 경우: 정권의 입지강화 성공 그러나 ... 너무 많은 상실
무모한 전면전시도로 사실상 전국토가 완전히 초토화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던 북조선 인민공화국이 전쟁을 통해 확실히 얻은 것은 국가의 형태를 채 갖추지 못한 연립정권으로 출발했던 김일성 정권이 전쟁 수행을 통해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점유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후에도 사소한 도전은 있었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후 지금까지 북한정권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얻은 것은 그 뿐이었다.
김일성 역시 한국전쟁의 수혜자그룹에 속한다. 한국전쟁이 없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그의 위상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먼저 분단을 극복하고자 결행했던 전쟁이었지만 이로 인해 분단은 더욱 공고해졌고 북한 정권은 도덕성 측면에서도 그동안 친일부역세력이 득세한 탓에 내심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자부했던 대한민국에게 이제는 동족 상잔의 내전을 도발 했다는 역비난을 듣게 되었다.
또한 일본이 식민강점기 북한지역에 건설했던 방대한 규모의 공업기반 시설과 사회 기반 시설 전부를 상실했고 극심한 폭격으로 인해 최소 이백만 이 넘는 민간인 사망자와 약 오십만의 전사자 최소 이백만에 이르는 월남 피난민들이 발생하여 극심한 전후피폐와 인력부족으로 이를 복구하는데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대외적으로는 극심한 국제적 고립을 감수해야만 했다. 한국전쟁을 통한 악감정의 축적은 미국과 최악의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는 이후 북한을 아직까지도 전사회의 병영화를 통한 군사국가로 만들었다.
전후 그들은 놀라운 잠재력을 발휘하여 경이로운 전후복구와 경제성장과 국력신장을 성취하여 70년대 초반까지 경쟁자 대한민국을 압도했지만 미국과의 대립은 결국 그들 성장의 한계와 걸림돌로 작용했고 이후 그들은 대한민국과의 체제경쟁에서 뒤쳐지고 만다.
군국주의가 극심했던 일본조차도 전쟁 마지막 해에만 유일하게 전체 GDP에서 군비의 비율이 30%수준을 넘었다. 그러나 지금 북조선 인민 공화국이 60년대부터 30년이 넘게 30%이상 수준을 유지해오고 있다는 사실은
현재의 북한이 얼마나 극심한 군사주의 국가이며 그들의 한계와 고민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해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민들의 삶이 개선 될 여지는 희박하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줄곧 희망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이를 수용할 의사가 없다는 데 있다.
한국전쟁의 뿌리 깊은 불신과 대립의 유산은 지금도 계속 북한을 짓누르고 있다.
6.남한의 경우: 오로지 잃었다.
한국전쟁 최대의 피해당사자중 한축인 남한은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
굳이 얻은 것으로 전쟁의 경험으로 인해 문학과 영화 등 예술분야의 소재가 풍성해졌다는 사실을 언급한다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북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완전했던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이 승만 정권과 친일부역 주류세력들은 나름대로의 정당성과 안정성을 얻었지만 이후 이러한 강요된 극우 냉전적 반공주의는 대한민국 자체가 표방했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근간마저 흔들어 버렸고 거의 40년의 세월동안 남한 역시 내재된 군사주의와 독재정치로 심각한 갈등과 분열의 양상을 겪어야 했다.
이를 극복하고 온전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까지 무수한 희생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나마 한국전쟁의 질서로 형성된 냉전독재정권이 아직까지 지속되지 않았다는 점은 다행한 일이지만, 한국전쟁의 유산으로 더욱더 깊어진 미국에 대한 의존도와 이후 남한 내 주류사회의 대미종속도는 일상화의 수준으로 정착되고 말았다.
물론 전쟁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억척스러움과 강인한 생명력이 이후 대한민국의 비약적인 경제발전과 번영의 밑바탕이 된 긍정적인 부분도 다소간 존재했지만, 전쟁을 통해서 상실한 것들과의 비교 자체가 불가능 할 정도로 전쟁의 상처는 깊고 크다.
먼저 한국전쟁 중 발생한 민간인학살과 폭격 등으로 전체 민족구성원 중 최소 10%~16%에 달하는 막대한 인명손실로 인해 한국전쟁으로 가족구성원 중 죽거나 다치거나 행방불명되지 않은 가구가 사실상 전무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5백만이 넘는 이산가족이 발생하여 아직까지도 망향의 그리움과 혈육을 잃어버린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7.한국전쟁 최대의 피해자: 우리 자신
이 사항은 남과 북 공히 공통된 사항이지만, 이토록 커다란 상처와 고통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은 각 해당구성원들에게 각 정권의 정체성과 공식담론에 의거한 한국전쟁의 피해만을 인지하고 말할 자유만을 허락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발생했던 자신들의 진정한 상처와 고통에 대해서 사실상의 침묵과 망각을 강요당한 것이다. 이 것은 심각한 의식의 단절과 왜곡 현상을 가져왔고 이후 한국전쟁을 통해 굳어질 대로 굳어진 민족분단을 더욱 더 악화시키는 유사 신앙적 의식으로 발전된다.
뿐만 아니라 더욱 고착화된 분단 구조는 지난 반세기 동안 남과 북 구성원 모두에게 막중한 군사비 부담을 부과했고 이로 인해 정상적인 국가라면 응당 돌아갔어야 할 기본적인 복지혜택마저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을 지속시켰다.
군복무의 부담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뜻을 펼쳐나가는 다른 세계의 젊은이들 이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여러 혜택이 없는 우리 청년들과 민족문화의 상실감과 그간의 손해 역시 깊고도 크다.
한국전쟁 최대의 피해자는 한민족 구성원인 우리 자신들이다.
우리는 이 끔찍했던 전쟁을 통해서 오직 상처와 피해만 입었다.
우리들의 손익계산서는 아직까지도 철저하게 적자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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