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관계'에 해당되는 글 16건

  1. 2014.02.05 Corruption Perceptions Index 2013
  2. 2012.08.26 놀이기구 탄 '北김정은 사진' 엄청난 비밀이
  3. 2012.08.26 조선의 운명을 결정한 가쓰라 태프트 조약
  4. 2012.08.26 이명박의 몽골 수모, 한국 외교사의 일대 치욕
  5. 2012.08.26 한국전쟁의 손익계산서
  6. 2012.08.26 멕시코의 마약 전쟁
  7. 2012.08.26 “美·中, 서해훈련 사전조정 있었다”
  8. 2012.08.26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9. 2012.08.26 독도 영유권 문제
  10. 2012.08.26 “잃어버린 북방영토 한반도 3배 크기… 백두산 위치도..

Corruption Perceptions Index 2013

국제관계 2014. 2. 5. 20:21

<출처:국제투명성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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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기구 탄 '北김정은 사진' 엄청난 비밀이

국제관계 2012. 8. 26. 21:11

[아시아경제 김영식 기자]최근 공개된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놀이기구 탑승 사진에 등장한 서양인이 영국 외교관으로 밝혀진 가운데 북한과 영국의 '물밑' 관계접근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보도했다.

김정은은 지난달 25일 평양 릉라인민유원지 준공식에 참석했으며,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이 류훙차이(劉洪才) 중국대사, 고모인 김경희 당비서, 군부 최고 실세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 등과 함께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사진을 공개했다. 1일 몇몇 외신은 여기에 함께 등장한 서양인의 신원은 바나비 존스란 이름의 영국 초급 외교관이라고 보도했으며, 영국 정부 관계자도 이를 확인했다.

 

현재 영국은 이탈리아, 스웨덴 등과 함께 평양에 대사관을 둔 몇 안되는 서방국가 중 하나다. 영국은 지난 2000년 토니 블레어 총리 당시 북한과 수교했으며 북한도 런던에 대사관을 설치한 상태다.

이를 바탕으로 영국은 북한 핵개발 문제와 인권문제 등에서 일정 부분 영향력을 행사해 왔으며, 특히 올해 개최되는 런던올림픽을 계기로 북한 정부와 더욱 접촉을 늘린 것으로 알려졌다. 하계올림픽에 이어 열리는 런던 장애인올림픽에는 북한이 처음으로 첫 출전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절에는 영국 외교채널이 직접적으로 연결된 경우가 거의 드물었지만, 문제의 사진을 계기로 김정은 시대 개막 이후 변화된 북한의 외교 자세, 그리고 영국의 대북 영향력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고 FT는 보도했다.

김영식 기자 gr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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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운명을 결정한 가쓰라 태프트 조약

국제관계 2012. 8. 26. 21:01

<출처:다음 이종격투기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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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의 몽골 수모, 한국 외교사의 일대 치욕

국제관계 2012. 8. 26. 21:00

<출처:오늘의유머>

 

 

이명박의 몽골 수모, 한국 외교사의 일대 치욕  

  번호 64974  글쓴이 부천사람사는세상 (ymchi)  조회 276  누리 27 (27,0, 4:3:0)  등록일 2011-8-24 00:15 대문 2  
  
이명박은 몽고에서 美 부통령 바이든을 끝내 만나지 못했다.

몽고에서 바이든과 만남을 기정 사실화 보도했던 한국 언론도 조용하다. 외국 언론을 검색해 보면 오히려 ‘바이든 만난다면서?’라며 한국에 묻는 보도가 나올 정도다. 이명박이 바이든을 만나지 못한 것은 한국 외교사에 커다란 수치로 기록될 것이며, 이명박 외교정책에 일대 전환을 가지고 올 정도로 파장이 큰 사건이다.

먼저 이명박의 몽고 일정을 간략히 살펴보자.

그는 21일(일) 밤 늦게 몽고에 도착했다. 22일(월) 몽고를 국빈 방문한 이명박의 첫 일정은 의장대 사열이었다. 그리고 몽고 대통령과 정상회담 이후에 공동선언문을 채택했다. 오전에는 수행한 참모와 회의를 가지고 ‘김정일의 러시아 방문은 긍정적이다’라고 말했다. 오전에 몽고 총리 및 국회의장을 접견했고, 몽골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몽고에서의 오전은 이렇게 갔다.

점심은 몽고 젊은이들과 오찬 간담회로 진행되었다. 이어 이명박은 동포 간담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실패해도 기회를 주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몽고에 거주하는 동포들에게 말했다. 이후 이명박은 ‘이태준 기념공원’을 방문해 헌화했다. 이어 몽골 의료관계자들을 만나서 격려했다. 그의 오후는 이렇게 갔다. 저녁은 대통령 주재 만찬에 참석했다.

23일(화) 오전에는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몽고 부총리의 예방을 받았다. 잠시 후 몽고를 떠나기 전 몽고 전통문화인 말타기, 활쏘기, 전통공연을 관람했다. 그리고 이명박은 몽고를 떠났다. 그의 몽고 방문은 조용했고, 떠나는 시각까지 조용했다. 뒤에 나오지만 바이든이 ‘말’을 선물받아서 외신에 크게 보도된 것과 대조적으로 이렇다 할 선물도 받지 못했다. 일국의 정상인데, 같은 날 방문한 미국 부통령이 받은 선물도 받지 못한 것이다. 몽고, 지금 차별하나.  

이명박이 몽고에 체류하던 바로 그 시각, 미 부통령 바이든도 몽고에 체류하고 있었다. 22일 오전 중국을 떠나 몽고에 도착한 바이든은 몽고에서 6시간의 짧은 체류를 했다. 도착 직후 의장대 사열을 한 바이든은 몽고 대통령, 총리, 국회의장과 연쇄 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몽고의 전통 씨름을 관람하고, 몽고로부터 ‘셀틱’이라는 이름의 말을 선물 받았다. 이명박과 같이 전통 활쏘기를 한번 하고는 다음 행선지인 일본으로 떠났다.

이명박 도대체 몽고에 왜 갔나?

이명박의 몽고 방문에 바이든이 중요한 의미는, 바이든 때문에 몽고에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체적인 과정을 보면 이명박을 대하는 미국의 태도가 고약하다. 바이든이 중국을 방문하고 있던 당시 미 백악관에서는 녹취록을 공개했다. 22일 동시에 몽고를 방문하는 바이든과 이명박이 회담을 가질 수도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식으로 말을 흘린 것이다. 말을 흘린 것은 미국이었다.

18일 美 백악관이 공개한 녹취록 내용이다. 바이든을 동행해 중국을 방문 중이던 고위 당국자가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한국 당국자들과 접촉을 해왔다. 바이든 부통령이 몽골에서 이 대통령과 만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전했고, 한국측에서도 같은 입장을 전해왔다”고 말한 것이다. 이 보도가 나간 이후부터 국내 언론에서는 22일 몽고에서 한-미 정상급 회담 개최에 힘을 실어서 보도했다.

그런데 백악관측의 태도가 모호하다. 녹취록을 공개한 당국자는 ‘바이든과 이명박이 일정의 기적(miracle of scheduling)으로 같은 날 같은 곳에 있게 된다’면서 두 사람의 회동을 자연스럽게 말했지만, 언론에 소개된 다른 당국자의 말은 또 달랐다. 바이든의 몽골 체류 일정이 매우 짧기 때문에(6시간) 이명박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이다. 백악관이 한국 정부를, 이명박 정권을 ‘부통령 면담’을 활용해 간을 본다는 느낌이 드는 상황인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이명박은 바이든과의 회동에 미련을 두지 않았어야 했다.  

그리고 비록 지켜지지 않았지만 부통령 바이든의 한국 방문은 오래 전 ‘약속’이었다. 지난 3월 미국을 방문한 특임장관 이재오가 바이든을 만나서 ‘바이든 올 여름 한국 방문’을 약속했다고 언론에 소개했다. 그랬던 것이 5개월이 흘러 8월 4일 백악관이 바이든의 중국-몽고-일본 3개국 순방 계획을 발표하면서 한국이 누락된 것이다. 백악관에서는 친절하게도 ‘한국 방문도 막판까지 고려 했었다’는 말을 해서 묘한 여운을 남겼다.

8월 4일 한국 방문이 취소된 이후에 백악관 녹취록 공개(18일)에서 나오듯이 이명박 정권은 바이든과 몽고에서 만나기 위해 수 많은 접촉을 했다. 그리고 14일 청와대에서는 이명박이 몽고-우즈벡-카작을 방문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 이후의 일은 앞에서 설명한 그대로이다. 미국은 부통령의 아시아 순방을 활용해 한국을 방한할 것처럼(그러나 제외하고), 몽고에서 만나줄 것처럼(그러나 안 만나주고) 분위기만 잡았다.  

이명박의 몽고 수모, 한국 외교사 일대 치욕

한국 언론에서 보도를 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런 일련의 상황을 가감 없이 보도했다면 이명박 정권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우리 국민들은 수모를 당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 바이든은 지금 일본에 갔다. 일본 언론에서는 대대적으로 방일을 보도하고 있다. 일본의 위상을 고려할 때 부통령 방일을 부풀린다는 느낌도 받는다. 일각에서는 일주일만 있으면 물러날 간 나오토 총리를 만나러 왜 왔을까 하는 의구심도 나타내고 있다.

바이든이 일본에 가서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이다. 대지진 사태 피해 지역을 둘러보고 주민들을 위로하는 것이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북한의 핵위협에 대한 미-일 공조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바이든은 중국에 가서도 북한의 핵위협에 대한 중국의 책임을 강조했었다. 언론 보도를 종합해 보면, 바이든 만나기를 학수고대했을 이명박을 가볍게 외면하고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물러날 간 내각과 북한 핵문제를 협의한다는 것이다.

6자 회담 당사국의 현재 외교 상황을 보자. 미국이 주도하고 있다. 바이든을 보내서 중국 후진타오, 시진핑과 북한 핵과 관련된 깊숙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몽고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명박을 모른척하고는 일본으로 가서 북한 핵 문제를 논의했다. 미-중-일이 북한 핵에 대해 논의하는 바로 그 시점, 북한의 국방위원장 김정일은 특별열차를 타고 러시아 대륙을 누비고 있다. 김정일은 곧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서 깊숙한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다.

북한 핵 문제의 직접 당사자인 대한민국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대통령은 지금 몽고에서 우즈벡으로 넘어가 있는 상태다. 6자 회담 당사국 중에서 미-중-일, 북-러의 5개국 정상들이 직접 나서서 서로간의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명박은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우즈벡과 4조원에 달한다는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고 언론에 소개되고 있다. 돌아가는 정황을 냉정하게 본다면 지금 한국 대통령이 자원개발 하러 다닐 때가 아니지 않은가.

몽고에서의 외면은 의도적으로 분석된다. 즉, 미국은 이명박 정권을 논외로 하고 6자 회담의 틀을 다시 짜는 분위기다. 이 변화를 주도한 세력은 북한이 아닌가 싶다. 5월 전격적인 중국 방문 이후에 대화의 기류가 형성되었고, 8월 다시 러시아를 방문하는 무렵에는 미국-중국-일본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천안함, 연평도 문제에 사과하지 않으면 결코 대화는 없다고 큰 소리쳤던 이명박 정권은 대북 강경노선만 고집하다가 지금은 낙동강 오리알 보다 더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다. 6월 초 북한이 공개한 ‘돈 봉투 구걸외교’ 이후로 한국의 외교적 고립이 이와 같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 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을 대하는 것이 저러한 실정이지 않은가.

마지막 궁금한 내용, 이명박은 왜 그토록 바이든을 만나려 했을까. 미국의 정보를 원했을까? 아니면 미국의 정보가 공개되는 것을 막으려 했을까? 그것은 북한 핵 문제였을까? 아니면 바이든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보면 국익이 아닐 수도 있는데 곧 미국으로 송환 예정이라는 BBK 김경준 문제였을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급히 서두르는 이명박을 보면서 곧 공개되겠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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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손익계산서

국제관계 2012. 8. 26. 20:59

<출처:오늘의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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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 앞서 반말체 인것을 아무쪼록 양해 부탁드립니다, 수정하기는 시간이 좀 그래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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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우리를 구해주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 54년 어느 세미나에서-

신이 내린 선물

-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 총리, 한국전쟁에 대해서-


사회사 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의 글이지만 이러한 글을 이어서 쓰기 앞서 한국전쟁으로 참전 당사국들이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따져보도록 하자.

그들 모두 공식적인 담론으로 나름대로 성과를 얻었다는 자부하는 한국전쟁의 실제 손익계산서에서 가장 큰 이득과 손해를 본 쪽은 어디일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전쟁 기간 중 전 세계는 2차대전 이후 첫 번째 호황경기를 누렸다.

전쟁의 발생은 자국의 영토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물자의 소모로 생산과 소비가 증가되고 군사인력과 왕성 해진 경제활동으로 실업이 감소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전쟁은 2차대전 이후 다시 침체되기 시작하던 세계 경제에 새로운 돌파구가 되었다.


1.미국의 경우: 막대한 경제적 이익, 위신손상과 고질병의 시작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공식적인 담론은 ‘부당한 공산침략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과 십자군 정신으로 참전했고 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결국 대한민국을 지켜냈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과 발전에 기여했다’ 지만, 당시 미국은 북한정권의 전면전 기도를 분명 알고 있었다. 정말 대한민국의 안전을 염려했다면 전쟁 발발직전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의 성명서 하나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었다. 가장 큰 수혜자는 미국 경제였고 그 다음은 2차대전의 종전으로 대폭의 예산삭감과 군 병력의 감축이 불가피했으며 과잉 생산된 군수물자의 재고부담을 안고 있었던 미 군부(특히 육군)였다. 맥아더의 고백처럼 한국은 미국을 구해주었다.

한국전쟁을 통해서 미국은 2차대전 못지않은 또 한번의 경제호황기를 누렸다.

니츠가 작성한 NSC 68 문서는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에 대한 예상수익 계획서나 마찬가지였다. 50년 180억 달러의 수준이었던 미군의 국방예산은 한국전쟁이 끝난 53년 무렵에는 2차대전수준인 500억 달러로 회복됐고 이후 지속된 미 소간 냉전을 이유로 막대한 예산을 의회로부터 승인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최근 밝혀진 자료에 근거해도 20세기 미국이 치룬 전쟁 중 2차대전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전비를 쓴 전쟁이 한국전쟁이라는 점에서 미국은 한국전쟁을 철저하게 자신들의 경기부양과 국방예산 증강을 통한 군부의 위상강화로 활용했다.

그러나 자존심과 위신에는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먼저 미군 사상 최초로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라는 초강대국답지 못한 좌절을 겪었고 미 육군은 일본군보다도 한참 수준이 떨어진다고 평가되던 아시아의 3류(?)군대 중국에게 미 육군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했다.

또한 사실상의 무제한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으로 전 북한지역을 초토화하여 2차대전 때도 볼 수 없었던 너무도 지나친 민간인 살상과 파괴를 자행, 세계여론의 빈축을 샀다.

특히 유럽지역에서의 미국의 외교적 위신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적지 않은 손상을 입었다.

가장 심각한 후유증은 2차대전과 한국전쟁을 통해서 미국의 군산복합체 산업구조가 고착화되면서 주기적으로 전쟁을 통한 경기부양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베트남전과 90년대 걸프전, 최근의 이라크 침공은 바로 한국전쟁 으로 굳어진 미 군산복합체구조의 전쟁중독 증세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냉전의 종식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전쟁중독증세와 전쟁특수로 인한 특정 업체들과 군부의 이익 챙기기는 21세기 들어서도 여전히 세계평화의 중대한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


2.중국의 경우: 주권수호에 성공, 대만문제 등 적지 않은 외교적 손해발생


중국이 북한을 도왔던 원인에는 수십 년 동안의 항일투쟁과 국공내전 기간 중 북한 정권과 조선인들의 헌신적인 희생과 도움, 적지 않은 출혈에 대한 보은의 성격과 그간의 끈끈했던 관계성도 작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한 국가의 생존과 국익 앞에서 이러한 요소는 부차적인 것 일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을 도왔다.

사실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출범한지 1년도 되지 않았던 신생 공화국 중화인민 공화국의 입장에서 참전은 다소 무리한 측면이 없지 않다.

당시 중국 지도부내에서도 참전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았던 상황에서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패권 장악이 신생공화국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점을 의식하여 결국 참전을 강행하였고 그런 측면에서 중국은 적지 않은 정치적인 성공과 군사적 성공을 동시에 거두었다.

같은 공산주의 형제국인 북조선 인민공화국과의 의리와 미 제국주의의 침략분쇄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세웠지만 그들 역시도 과거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외교 안보적 기본사고 틀이었던 순망치한(脣亡齒寒) 논리의 연장선에 서 있었다.

열세의 화력과 장비, 보급능력에도 불구하고 중국군 지휘부는 초강대국 미군의 약점을 정확히 분석하여 역이용한 탁월한 전술과 작전으로 멸망직전에 놓였던 북한 정권을 단숨에 구하면서 화려하게 세계사의 무대에 신고식을 치렀고 단숨에 극동 아시아에서의 새로운 강자로 부각된다.

신생공화국의 주권과 영토 그리고 정치적인 위상을 높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참여로 대만과의 통일기회를 사실상 놓쳐버렸고 그로 인한 부담은 지금도 여전히 대륙정권의 고민으로 남아 있다. 또한 오랜 내전으로 인해 피폐된 인민들의 삶을 위한 내실 다지기의 기회 역시 상실했다. 한국전쟁으로 중국인민들의 삶은 더욱 고달파졌고 고통스러워졌을 뿐이다.

중국의 참전은 신생 중화인민 공화국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렸지만 외교적 손해도 적지 않았다. 특히 미국과의 전쟁으로 인한 관계악화는 이후 20년 동안 세계 외교무대에서 중국에게 걸림돌로 작용했다.

당시에도 시급했던 외교과제 중 하나였던 미국과의 관계개선은 커녕 악화일로의 길을 자초한 셈이다. 이미 강대국가였지만 유엔 등에서 중국이 강대국다운 대접을 받게 된 것은 70년대 초 미국과의 관계를 회복한 후에나 가능했다.


3.소련의 경우: 노회한 국익 챙기기에 성공, 큰 손해 없이 안전운행


북한의 전면전 준비를 도와준 장본인이자 후견인이었고 북조선 인민공화국 창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소련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특별히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다.

애초부터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그토록 역설했던 한반도의 분단극복을 위한 통일전쟁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그저 한반도의 전쟁이 미국과의 전면전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한국전쟁 전면에 나서기를 극도로 꺼려했다.

소련은 미국에게 필사적으로 전면전을 할 의사가 전무하다는 의중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런 측면에서 그들은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50년 가을 김일성정권이 존폐의 위기에 몰렸을 때조차도 소련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하여 아예 북한에서 손을 뗄 궁리부터 했고 이후 전황이 역전되자 이번에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조기 휴전보다는 중국에게 지속적인 전쟁수행을 배후 교사하는 등 노회하게 자국의 이익추구에만 몰두 했을 뿐이다.

북한에 공급했던 상당수의 군사 장비와 물자 역시 구상무역을 통해서 적지 않은 수입을 챙겼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소련의 이율배반적 행태는 전후 북한에서의 점차적인 영향력 상실로 이어졌다. 먼저 북한은 그 어느 때보다 중국과 가까워졌고 북한정권 내에서 권력의 한축을 담당했던 소련출신 한인계는 급속도로 몰락했다.

또한 중국의 급속한 부상으로 결국 사회주의권에서의 독보적인 위치를 위협받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50년대 후반 중소간의 분쟁과 대립으로 격화된다.

그러나 소련은 한국전쟁으로 북한과 중국이 감수했던 것과 같은 극심한 손해를 본 것은 없다.


4.일본의 경우: 최고의 수혜자, 구매하지도 않은 복권의 대박!


한국전쟁에 표면적으로는 참전하지도 않았고 외견상으로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일본이 한국전쟁에서 유일하게 혼자 막대한 이익만을 챙겼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역설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2차대전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고 패전국의 처지로 전락하여 종전 후 5년 동안 극심한 불경기와 이로 인한 사회혼란(일본 역시 좌우대립이 극심했음)으로 이후 전망이 매우 불투명했던 일본에게 한국전쟁은 기사회생의 기회를 제공했다.

미국이 한국전쟁 수행을 위해서 일본을 최적의 군수기지로 이용하면서부터 쏟아져 들어온 막대한 장비와 물자와 자금을 토대로 일본경제는 전후 첫 번째 호경기를 누렸다.

미군은 심지어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 사용될 귀순권유전단까지도 일본에서 인쇄주문을 맡길 정도였으니, 일본의 사실상 모든 산업이 한국전쟁 특수의 혜택을 톡톡히 입은 셈이다.

(만성무역적자에 시달리던 일본경제는 50년 바로 흑자로 돌아섰고 한국전쟁 특수로당시 화폐기준 총 24억달러의 어마어마한 수입을 올렸다. 전쟁 발발 1년만에 미국은 대일본원조를 중단했다)


특히 전쟁물자의 한국수송과 이미 보유하고 있던 공업기술력을 바탕으로 한반도에서의 전투로 파괴된 미군 장비의 수리창 역할까지 전담하게 되면서 부터 전쟁으로 피폐된 일본경제는 완전히 기사회생하게 된다.

50년 이후 10여년간 일본경제는 연평균 10%이상의 고성장시대를 구가했고 한국전쟁기간 중 축적된 한반도 정보인프라와 한반도에 대해 정통한 전문 인력을 미군에게 공급 하면서 패전국이 아닌 극동아시아 안보의 파트너로서 승격되는 부가적인 이득까지 챙긴다.

거기에 주일미군이 모두 한반도에 투입되면서 생긴 안보 의 공백을 채우고 이후 격화된 냉전을 이유로 사실상 군대를 완전히 폐지한 평화헌법에도 불구하고 자위대를 통한 재무장의 기회를 얻게 되는 최대의 정치군사적 이익을 얻었을 뿐 아니라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서 극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안보기지와 파트너로서의 위상을 감안한 파격적인 조건으로 패전국지위에서 벗어나는 외교적인 승리까지 거머쥐게 된다.

오늘날 일본이 패전국 독일에 비해서 불충분한 전후 처리에도 불구하고 다시 경제 강국으로 부상함과 동시에 재무장을 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면전에서 기원한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막대한 경제적 이익과 기대하지 않았던 정치,군사, 외교적 부수입까지 모두 얻어낸 한국전쟁 최고의 수혜자였다.

남북의 두 정권은 그들이 그토록 미워했던 일본에게 부흥과 재무장이라는 정말 주고 싶지 않았을 선물을 동족상잔의 내전을 통해서 고스란히 헌납했다.


5. 북한의 경우: 정권의 입지강화 성공 그러나 ... 너무 많은 상실


무모한 전면전시도로 사실상 전국토가 완전히 초토화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던 북조선 인민공화국이 전쟁을 통해 확실히 얻은 것은 국가의 형태를 채 갖추지 못한 연립정권으로 출발했던 김일성 정권이 전쟁 수행을 통해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점유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후에도 사소한 도전은 있었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후 지금까지 북한정권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얻은 것은 그 뿐이었다.

김일성 역시 한국전쟁의 수혜자그룹에 속한다. 한국전쟁이 없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그의 위상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먼저 분단을 극복하고자 결행했던 전쟁이었지만 이로 인해 분단은 더욱 공고해졌고 북한 정권은 도덕성 측면에서도 그동안 친일부역세력이 득세한 탓에 내심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자부했던 대한민국에게 이제는 동족 상잔의 내전을 도발 했다는 역비난을 듣게 되었다.

또한 일본이 식민강점기 북한지역에 건설했던 방대한 규모의 공업기반 시설과 사회 기반 시설 전부를 상실했고 극심한 폭격으로 인해 최소 이백만 이 넘는 민간인 사망자와 약 오십만의 전사자 최소 이백만에 이르는 월남 피난민들이 발생하여 극심한 전후피폐와 인력부족으로 이를 복구하는데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대외적으로는 극심한 국제적 고립을 감수해야만 했다. 한국전쟁을 통한 악감정의 축적은 미국과 최악의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는 이후 북한을 아직까지도 전사회의 병영화를 통한 군사국가로 만들었다.

전후 그들은 놀라운 잠재력을 발휘하여 경이로운 전후복구와 경제성장과 국력신장을 성취하여 70년대 초반까지 경쟁자 대한민국을 압도했지만 미국과의 대립은 결국 그들 성장의 한계와 걸림돌로 작용했고 이후 그들은 대한민국과의 체제경쟁에서 뒤쳐지고 만다.

군국주의가 극심했던 일본조차도 전쟁 마지막 해에만 유일하게 전체 GDP에서 군비의 비율이 30%수준을 넘었다. 그러나 지금 북조선 인민 공화국이 60년대부터 30년이 넘게 30%이상 수준을 유지해오고 있다는 사실은

현재의 북한이 얼마나 극심한 군사주의 국가이며 그들의 한계와 고민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해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민들의 삶이 개선 될 여지는 희박하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줄곧 희망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이를 수용할 의사가 없다는 데 있다.

한국전쟁의 뿌리 깊은 불신과 대립의 유산은 지금도 계속 북한을 짓누르고 있다.


6.남한의 경우: 오로지 잃었다.


한국전쟁 최대의 피해당사자중 한축인 남한은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

굳이 얻은 것으로 전쟁의 경험으로 인해 문학과 영화 등 예술분야의 소재가 풍성해졌다는 사실을 언급한다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북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완전했던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이 승만 정권과 친일부역 주류세력들은 나름대로의 정당성과 안정성을 얻었지만 이후 이러한 강요된 극우 냉전적 반공주의는 대한민국 자체가 표방했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근간마저 흔들어 버렸고 거의 40년의 세월동안 남한 역시 내재된 군사주의와 독재정치로 심각한 갈등과 분열의 양상을 겪어야 했다.

이를 극복하고 온전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까지 무수한 희생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나마 한국전쟁의 질서로 형성된 냉전독재정권이 아직까지 지속되지 않았다는 점은 다행한 일이지만, 한국전쟁의 유산으로 더욱더 깊어진 미국에 대한 의존도와 이후 남한 내 주류사회의 대미종속도는 일상화의 수준으로 정착되고 말았다.

물론 전쟁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억척스러움과 강인한 생명력이 이후 대한민국의 비약적인 경제발전과 번영의 밑바탕이 된 긍정적인 부분도 다소간 존재했지만, 전쟁을 통해서 상실한 것들과의 비교 자체가 불가능 할 정도로 전쟁의 상처는 깊고 크다.

먼저 한국전쟁 중 발생한 민간인학살과 폭격 등으로 전체 민족구성원 중 최소 10%~16%에 달하는 막대한 인명손실로 인해 한국전쟁으로 가족구성원 중 죽거나 다치거나 행방불명되지 않은 가구가 사실상 전무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5백만이 넘는 이산가족이 발생하여 아직까지도 망향의 그리움과 혈육을 잃어버린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7.한국전쟁 최대의 피해자: 우리 자신


이 사항은 남과 북 공히 공통된 사항이지만, 이토록 커다란 상처와 고통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은 각 해당구성원들에게 각 정권의 정체성과 공식담론에 의거한 한국전쟁의 피해만을 인지하고 말할 자유만을 허락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발생했던 자신들의 진정한 상처와 고통에 대해서 사실상의 침묵과 망각을 강요당한 것이다. 이 것은 심각한 의식의 단절과 왜곡 현상을 가져왔고 이후 한국전쟁을 통해 굳어질 대로 굳어진 민족분단을 더욱 더 악화시키는 유사 신앙적 의식으로 발전된다.

뿐만 아니라 더욱 고착화된 분단 구조는 지난 반세기 동안 남과 북 구성원 모두에게 막중한 군사비 부담을 부과했고 이로 인해 정상적인 국가라면 응당 돌아갔어야 할 기본적인 복지혜택마저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을 지속시켰다.

군복무의 부담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뜻을 펼쳐나가는 다른 세계의 젊은이들 이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여러 혜택이 없는 우리 청년들과 민족문화의 상실감과 그간의 손해 역시 깊고도 크다.


한국전쟁 최대의 피해자는 한민족 구성원인 우리 자신들이다.

우리는 이 끔찍했던 전쟁을 통해서 오직 상처와 피해만 입었다.

우리들의 손익계산서는 아직까지도 철저하게 적자상태다. 
:

멕시코의 마약 전쟁

국제관계 2012. 8. 26. 20:57

<출처:오늘의유머>

 

 

베스트간 멕시코 경찰 특공대 전멸 글을 보고 어느 정도인가 한번 찾아 봤습니다

1. 발단

우리도 한미 FTA 당시 관심을 가졌던 멕시코의 NAFTA 가입을 계기로 그때당시까지만 해도
먹고 살만했던 농민들이 싸그리 전멸 먹고 살길이 없어진 농민들은 대부분 미국으로 밀입국을 하거나
마약 조직에 흡수됨. 현재는 마약을 재배하는 초기 단계에서 벗어나(마약의 원료를 생산하는 이들의 절대다수는 제3세계 극빈국의 농민들) 전 세계에서 마약을 수입 유통하는 단계로 진화

2. 현재상태

2006년 멕시코 당국이 마약전쟁을 선포한 이후 2010년 까지 4만명이 죽음
경찰,군인,조직원,민간인 뿐만 아니라 언론인,법조인,마약반대론자를 막론하고 무차별적으로 살해 당함
티비에서 마약 반대를 외치던 언론인이 다음날 목이 잘린 시체로 발견 되거나 신문사 방송국에 폭탄이
터지고 기관총 세례를 받는 일이 일상이 되버리자 언론도 제 목숨 부지하기위해 보도를 포기함
마약조직은 사제 잠수함으로 미국으로 마약을 유통시키고 사제 장갑차와 심지어 회전 포탑을 갖춘
전차까지 만들어 전쟁에 임하고 있음
특히 국경도시 인근 지역은 서방세계 에서는 아프카니스탄이나 내전 중인 아프리카의 국가들과 동급
취급을 받고 있음
이들 도시에는 시내 곳곳에 마약 조직이 인원을 모집하는 플랭카드가 전화번호와 함께 버젓이 걸려있음
특히 전현직 군인들이 우대 받는다고 함. 멕시코의 대마약 전담 특수부대가 통째로 마약조직에 흡수되어
현재 가장 위험한 조직으로 활동중
상대 조직원을 죽이고 시내 한복판에 목을 매달아 놓는 일도 일상이라 살해된 갱단 시체 수십구 발굴
이런 뉴스거리는 우리가 보기에는 기막힌 일이지만 이들에게는 더 이상 충격도 아님
경찰은 더 이상 마약조직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어 믿을수 없고 그나마 군인들이 좀 더 믿을만하다고
함. 그러는 와중에도 현상금 수백만 달러가 걸린 마약 조직 두목들이 사살되거나 잡히는등 나름의 성과도
있긴하나 정작 국민들은 이 전쟁의 승자가 마약 조직이 될거라 확신하는 상태
얼마전 멕시코시티에서는 마약전쟁을 중지하라는 대규모 시위까지 발생

3. 위험지역

남쪽의 관광도시들은 비교적 치안이 괜찮은곳도 있으나 멕시코시티를 비롯한 북부의 도시들
특히 미국과의 국경 인근 도시로 가면 완전 헬게이트 수준
그중에서도 압권은 텍사스주와 맞닿아 있는 국경도시 후아레즈
수천명의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음에도 하루평균 8명 정도가 살해 당하고 있으며 갱단이 폭탄을 설치해
놓고 경찰에 전화를 걸어 출동한 경찰들이 폭사당하는 일도 일어남
실제로는 몇명이 죽는지 파악도 힘듬 이쪽 지역이 사람 죽여놓고 사막에다 던져 놓으면 평생가도 못찾는
일이 다반사
2010년 20세의 여대생이 경찰서장직을 맡아 화제가 된적이 있으나 연이은 살해협박 납치시도에 결국
포기하고 현재는 미국으로 망명을 준비하는 중 신임 경찰서장이 부임하거나 새로 경찰서가 생기면
갱단이 기관총과 폭탄 선물을 안겨주는 곳
2010년 12월 이 지역의 마지막 여경이 자택에서 납치된 후 행방불명 상태 현재 여경이 없음
구글에 Ciudad Juarez drug 로 이미지 검색하면 그 실상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음

4. 번외

-NAFTA로 멕시코 농민들은 폭삭 망하고 멕시코는 마약 국가가 되버렸지만 전세계 갑부순위 1위는
멕시코인 카를로스 슬림임. 슬림은 NAFTA 이후 닥치는 대로 민영화되던 공기업들,공공시설들을 무차별 적으로 흡수해 세계 제1의 갑부가 됐음 멕시코에서는 슬림에게 돈을 내지 않서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한다는 말을 할 정도

-멕시코는 G20가맹국 이번 회담에도 참여 했음. G20국가들중 가장 낮은 복지 지출을 하는 국가
그 다음이 바로 대한민국

-마약조직외에 사파니스타 라는 반정부 무장 조직이 존재하는데 이 조직이 좀 특이함
이들이 무장봉기를 한 이유는 NAFTA당시 멕시코 정부가 헌법 27조 12항(토지개발시 원주민들에 대한
보상에 관한 법률)을 삭제해 버리자 멕시코 원주민들과 농장경제가 급속히 몰락해 버린데 대한 반발로
일어난 단체임. 이들은 반세계화,아니키즘을 자신들의 이론으로 내세우며 특이하게도 무장저항 보다는
인터넷,휴대폰 등을 통해 자신들의 정당성을 설파하는데 더 주안점을 두고 있음
특히 이 단체의 부지도자인 마르코스는 카리스마와 언변으로 제2의 체게바라 라고 불리울 정도
뉴욕 타임즈는 이들을 20세기 최초의 포스트 모더니즘 혁명 집단이라 평하였고, 유명밴드 RATM이 이들의
적극적인 지지자임. 한마디로 무장집단 이면서도 무력투쟁 보다 언론투쟁을 하는 집단

-멕시코 한류 열풍의 시발점은 바로 댄스게임 펌프 라고 함.

-멕시코 갱단들이 가장 많은 총기를 수입하는 국가가 바로 미국. 미국에 유통되는 마약의 가장 많은 양이
멕시코에서 유입되는 마약임. 미국의 범죄자들은 멕시코로 도피하고, 멕시코 사람들은 미국으로 밀입국을 함
아주 대단한 자유 무역임



엔하위키와 인터넷을 토대로 작성 했습니다
:

“美·中, 서해훈련 사전조정 있었다”

국제관계 2012. 8. 26. 20:56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는 가운데 미국과 중국이 현재 실시중인 서해 한·미 연합훈련을 앞두고 막후 의견교환을 통해 크게 3가지 사항에 합의했다고 장성민 전 민주당 의원이 주장했다. ‘세계와 동북아 포럼’ 대표이기도 한 장 전 의원은 30일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미국의 전직 고위 관리로부터 입수한 정보”라면서 그 내용소개했다.

 

장 전 의원에 따르면, ①미국은 서해 훈련에 대한 중국의 우려를 수용해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함이 충남 태안반도 이북으로 올라가지 않고 ②대신 중국은 훈련 기간중 북한의 추가 도발을 억제하기 위해 중국에서 북한으로 들어가는 석유파이프를 차단하는 한편 ③미·중 양국은 서해 훈련이 끝난 뒤 6자회담 재개를 추진하는 등 대화국면 전환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장 전 의원은 “미군이 연평도 인근까지 올라가서 강력한 대북 무력시위를 했으면 하는 한국민의 바람과 달리 미 항모가 태안반도 이남에서 훈련을 하는 것은 이런 내막 때문”이라면서 “지난 천안함 사건 때에 비해 이번엔 중국의 반발이 약한 것도 미·중간 사전 교감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이번 훈련 기간 중 중국은 북한으로 가는 송유관 3개 중 1개를 차단키로 했다.”고 말했다. 지난 2003년 우라늄 농축 의혹을 받아온북한이 제네바 합의 파기를 선언하자 중국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단둥(丹東)에서 신의주로 이어지는 송유관을 3일간 잠근 전례가 있다.

그러나 미·중이 6자회담 재개를 추진키로 했다는 ③번 합의사항은 최근 나타나고 있는 기류와 상반되는 것이다. 지난 28일 중국은 6자회담 수석대표 회동을 제안했고, 이에 대해 한·미·일 등은 즉각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이에 대해 장 전 의원은 “한반도에 무력충돌 가능성이 위험수준에 다다랐다고 미·중 양국이 판단, 위기 관리 국면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공감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제관계 2012. 8. 26. 20:54

이스라엘은 세계 곳곳에서 핍박을 받던 민족이었습니다.
 특히 유럽에서 엄청나게 핍박을 받았는데.. 이차세계대전때가 하일라이트로 러시아에서도 백만명 단위로 죽었고 다들 알다시피 독일은 아우슈비츠같은 유대인전용 소각시설;;을 만들어 거의 점령지안에 유대인 씨를 말렸죠.유태인은 원체 평판이 좋지 않았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다. 일반일들도 유태인을 벌레처럼 생각했죠. 웃긴예로 독일의 바그너라는 작곡가는 유태인작곡가였던 멘델스존곡을 연주할때 더럽다고 꼭 장갑을 끼고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뭐 교황까지 독일의 유태인 말살을 묵인하고(유태인좀 죽이면 어때 우리만 안전하면 되지 라는 식으로;;) 않좋은일에 대한 온갖 누명을 뒤집어 쓰고 살았죠.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상인인가를 보면 나오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돈이 없으면 살로 갚으라는)이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모습이었죠. 그래서 질병이 퍼져도 전쟁이 나도 날씨가 좀 지랄같아도 일단 좀 죽이고 조지고 보는 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중동에서는 유대인과 이슬람아이들이 비교적 평화롭게 살고있었습니다. 이슬람아이들은 비교적 타종교에 관대했고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뿌리도 비슷하였기에 거의 박해 없이 이웃사촌으로 알콩달콩살았지요. 그래서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슬람인들은 모스크를 유대인들은 지네 예배당을 지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즉 그냥 유대인들이 돈 퍼들고 와서 대충 같이 엉켜 살아도 받아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원래 팔레스타인쪽은 1차세계대전때 터키영토였고 반란을 일으켜 연합군을 도와준 대가로 얻은 땅이었습니다.

 근데 갑자기 이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이야기가 많이 달라집니다. 영국의 유태인 과학자가 아세톤(실험실에서 쓰는 세척제같은 건데 총포딱을떄 쓰고 이곳저곳에 필요합니다)을 만들어서 전쟁에 큰 도움을 주고 그 대가로 자기들의 나라를 만들어 달라고 하죠. 뭐 유태인의 자금도 전쟁을 많이 도왔고 원체 영국과미국에 유태인출신과학자와 경제인들이 엄청많았고 꽤 힘이 있었지요.

 또 원체 영국이란 나라자체가 쓰레기여서 이차세계대전때 여러나라와 이중계약을 하곤했습니다. 같은 지역에 2민족에게 둘다 독립시켜 주고 나라 만들어 주겠다는 식으로 말이죠.그래서 떡하니 팔레스타인도 지네를 도왔음에도 불구하고 떡하니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을 세웁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들을 받아주었던 팔레스타인과 달리 이곳은 원래 고향이라면서 원래 살던 이슬람인들을 내쫒아냅니다. 집에 초대한 손님이 강도가 되어 버린거죠.


 그래서 결론적으로 유럽에서와 달리 그들을 박해하지 않고 이웃으로 받아주었던 그들에게 총칼을 들이대고 나라를 빼앗습니다. 이로인해 끝없는 아랍대 유대계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전쟁이 벌어질때마다 말도 않되는 차이로 미국의 지원과 자본력이 있는 이스라엘이 계속이겨왔구요.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인들은 침입자에 살인마 들이죠. 제 생각도 같습니다. 그들의 폭탄테러를 단순히 테러가 아닌 독립운동으로 생각할 수있죠. 침략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이 미사일몇개를 이스라엘에 발사했다고 폭력국가라고 몰아 부치고 미친듯이 사람을 죽이고 있는 이스라엘은 미국부시의 지네나라 빌딩 무너졌다고 나라2개(아프카니스탄,이라크)를 개박살을 내놓고 수많은 죄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과 아주 비슷하죠.

 이런 식의 침략자가 한나라에 들어와서 사람을 학살하고 씨를 말리는 것을 역사에서 보자면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인디언 씨를 말린 미국정도를 들 수 있겠네요.인디언들은 배타고 온 유럽인들에게 옥수수를 꾸어 주었으나 결국 미국인들은 총을 들이대지요.인디언들은 활들고 저항하나 서부영화에서 보듯이 결국 무참히 학살당합니다.

 그리고 참고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외에 다른 민족들은 구원받지 못할 하등한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자기들의 종교를 다른 모든 사람에게 퍼트렸다는걸 인정하지 않는 것이구요. 이 지구상에 유일하게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은 유대인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때문에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학살에는 자비가 전혀 없는듯이 보입니다. 

 

 

댓글

 

유대왕국은 2천년 전의 일로써 로마제국의 공격을 받아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져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제국이 망하자(476년) 주인없는 벼려진 땅에 아랍인들이 서서히 터를잡고 이후로 쭉 거주하였던 것이었습니다. 한때 만주지방이 우리나라영토였지만 지금은 중국영토가 된것 처럼 이스라엘지방은 엄연한 팔레스타인땅인 것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유대인들이 only 개독경을 근거로 팔레스타인쪽에 거주하기 시작하더니 미국의 편애를 등에 업고 마침내 일방적으로 나라를 세우게 되죠. 이게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분쟁의 시작입니다.  "한마디로 여기 2천년전에 우리집이었어, 그러니까 이제 우리집 내놔"이런식인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두눈 뜨고 나라 빼앗긴 꼴이죠. 우리나라도 일제치하에 윤봉길의사, 안중근의사가 의거를 했던 것 처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도 테러가 아닌 의거였던 것입니다. 최소한 우리는 팔레스타인의 의거를 테러라고 해선 안됩니다. 억울한건 팔레스타인인고, 침략자는 이스라엘입니다. 개독경에 현혹되어 왜곡된 역사관을 갖지 마시고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보시길 바랍니다.

 

 

<출처:오늘의유머>

:

독도 영유권 문제

국제관계 2012. 8. 26. 20:53

<출처:야후블로그>

 

독도 영유권에 대해서는 사실 그렇게 길게 떠들 필요가 없다. 단 하나의 근거면 된다. 1900년 있었던 고종의 칙령 41호가 그것이다.

勅令第四一號  (칙령 제41호)

鬱陵島를 鬱島로 改稱하고 島監을 郡守로 改正한 件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 건.

第一條 鬱陵島를 鬱島라 改稱하야 江原道에 附屬하고 島監을 郡守로 改正하야 官制中에 編入하고 郡等은 五等으로 할事
제1조  울릉도를 울도라 개칭하여, 강원도에 부속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관제중에 편입하고 군등은 5등으로 할 일.

第二條 郡廳位置는 台霞洞으로 定하고 區域은 鬱陵全島와 竹島石島를 管轄할 事
제2조  군청위치는 대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를 관할할 일.

第三條 開國五百四年八月十六日官報中 官廳事項欄內 鬱陵島以下十九字를 刪去하고 開國 五百五年 勅令第三十六號 第五條 江原道二十六郡의 六字는 七字로 改正하고 安峽郡下에 鬱島郡三字를 添入할 事
제3조  개국504년 8월 16일자 관보중 관청사무란내 울릉도 이하 19자를 지우고, 개국 505년 칙령 제 306호 제5조 강원도 26군의 6자는 7자로 개정하고, 안협군밑에 울도군 3자를 첨입할 일.

第四條 經費는 五等郡으로 磨鍊하되 現今間인즉 吏額이 未備하고 庶事草創하기로 該島收稅中으로 姑先磨鍊할 事
제4조 경비는 5등군으로 마련하되 현재 이액이 미비하고 서사초창하므로 이 섬의 세수에서 먼저 마련할 일.

第五條 未盡한 諸條는 本島開拓을 隨하야 次第磨鍊할 事
제5조  미진한 제 조항은 이 섬을 개척하면서 차제에 마련할 일.

附則
第六條 本令은 頒布日로부터 施行할 事

부칙
제6조  본 령은 반포일로부터 시행할 일.

光武四年十月二十五日
御押 御璽 奉
勅 議政府議政臨時署理贊政內部大臣 李乾夏

광무4년 10월 25일
어압 어새 봉
칙 의정부 의정 임시서리 찬정 내부대신 이건하


어차피 근대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새로이 구성된 세계질서 아래에서 근대 이전의 영토영유권이라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심지어 근대적인 "문명"을 갖추지 못한 국가도 아닌 사회에 대해서는 국제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는 학자까지 있을 정도이고 보면 근대 이전에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은 말만 길어질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근대에 들어서고 나서 어떠한 구체적이고 공식적인 근대적인 조치가 취해졌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이 내세우는 가장 큰 근거가 1905년 시마네현 고시로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킨 것이다. 근대국가에서 근대적인 절차에 따라 영토로 편입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다시피 대한제국은 비록 일본에 의해 일본이 의도한 바에 따라 조선을 대신해 이름만 바뀌어 세워진 나라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또한 이제까지와는 다른 상당히 많은 다양한 근대적인 요소를 갖고 있던 최초의 근대적인 국가이기도 하다. 실제 그것을 전제로 서구의 여러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기도 했었고. 따라서 대한제국 아래에서 공인된 문서나 조약은 국제적으로도 그 유효함을 인정받는다. 그리고 칙령 41호는 바로 그 대한제국의 황제가 내린 국가원수의 명령으로서 지금도 그렇지만 국가원수가 공식화한 명령은 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

다시 말해 근대 대한제국에서 황제에 의해 독도를 대한제국의 영토로 선언한 이상 이미 게임은 끝난 거나 같다고 할 수 있다. 근대국가에서 근대적인 절차에 따라 보다 앞서서 영토라 선언한 확실한 근거가 있는데? 그것 때문에 일본에서는 칙령에서 말한 석도가 독도가 아닌 관음도를 가리키는 것이라 우기고 있기도 한데, 대저 우리의 전통적인 한자표기라는 게 이두식으로 독음을 따거나 아니면 훈을 쫓아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가 전에 살던 동네가 독산동이었는데, 여기를 달리 말뫼라 부르기도 했었다. 말뫼에서 또 두산이 나왔고. 독禿은 머리 독자이고, 두斗는 말 두자고, 뫼야 산山의 순우리말이고, 그래서 독산도 두산도 말뫼도 다 같은 곳을 일컫는다. 가리봉과 가산동이 원래 같은 동네였던 것과 같다.

실제 전국의 지명을 보면 독다리石橋里니 독배기石田坪이니 하며 한자로는 돌 석石을 쓰되 읽기로는 독으로 읽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말하자면 독獨은 음으로서 가차하여 표기한 것이고, 석石은 뜻을 쫓아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당시에도 쓰기는 석도라 썼어도 독도라 읽었을 것이라는 정황은 차고도 넘친다는 말이다. 그것을 부정할 거라면 우리의 오랜 역사서나 당장 한밭이니 달구벌이니 쓰는 지명들도 전혀 다른 곳이라 해야 할 거다. 그럴 수 있다면 말이지. 양심을 떨이로 내다 팔 거라면 가능할 거다. 한 마디로 다 쓰잘데기 없는 소리라는 거다.

물론 언제나 그렇지만 어떠한 사안을 두고 다툴 때 근거가 있어서 주장을 하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근거가 있어 주장했더라도 어느샌가 관성이 붙어 그렇게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는 거다. 말하자면 똥고집이라는 건데, 경험해 보았으면 알겠지만 일단 똥고집 단계로 넘어가면 답이 없다. 어떤 근거를 들이밀어도 그동안 해 온 것들 때문에라도 어떻게든 우겨대지 않으면 안 되는 상대와는 아예 대화라는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지금 일본이 그런 입장이다. 그동안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줄창 주장해 왔으니 이제 와 아니라고 하기에도 자국 정치인이나 유권자 보기가 뻘쭘한 거라. 그래서 틈만 나면 별의 별 억지를 부려대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게 문제다. 차라리 근거를 가지고 논리로서 시비를 거는 거라면 근거와 논리로서 상대를 사뿐히 즈려밟아주면 되는 것을, 이제는 근거도 필요 없고 논리도 필요없고 아무튼 그냥 들이밀고 보자는 단계이고 보니 전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거다. 무어라 해도 들을 생각이 없고, 아무리 근거를 갖다 들이대도 볼 생각이 없고, 그냥 그렇게 믿고 주장하겠다 하는 데는 이건 도대체 답이 없는 거다. 어린아이 떼 쓰는 것도 아니고. 여기에 정부의 고민이 있다. 만만하기라도 하면 한 대 후려패서라도 정신을 차리도록 하면 좋을 텐데 그조차도 쉽지 않으니. 정말 답이 없는 인종들이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문제의 해결은 먼저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것부터 하는 거다. 감당하지도 못할 다양하고 방대한 지식보다는 한 가지 확실한 근거로서 대하는 것이 최선이다. 많이 아는 것보다 한 가지를 제대로 안다면 그것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지엽말단은 무시하라. 별별 잡다한 근거로서 논지를 흩뜨리려 하면 그냥 무시해 버리라. 가장 확실한 한 가지만 제대로 알고 주장할 수 있으면 그런 것들 따위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지엽말단에 불과할 터이니. 지엽말단 붙잡고 있어 봐야 가장 중요한 한 가지면 그걸로 끝나는 거다. 그것이 쓸데없이 길고 복잡하기만 한 논쟁에서 확실히 상대를 누르는 방법이다.

1900년 고종은 41호 칙령을 통해 독도 - 석도를 대한제국의 영토로서 선언했고, 국가원수의 공식화된 선언은 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 그것은 1905년 일본의 시마네현 고시보다도 빠른 것으로서 이로써 근대적인 영토주권이 확립되었다. 따라서 국제법상 독도에 대한 권리는 오로지 대한제국과 그 계승자인 대한민국에 있다. 독도와 석도는 지금도 한국내 여러 지명에서 찾아볼 수 있듯 결국 같은 말이고. 그리 길지도 복잡하지도 않지? 이것이 핵심이다. 굳이 이것저것 챙길 것 없이 이것 하나로 모든 것은 끝난다. 그런데도 계속 우겨대면? 그건 상대할 가치도 없는 병신이니 무시해주면 되겠다. 바보가 옮으면 약도 없다.



주의) 참 빼먹은 게 있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차원에서 이렇다는 거다. 전문적으로 들어가자면 한도끝도 없으니까. 설마 모든 사람들이 그 수많은 자료들을 일일이 찾아 외우고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그런 사료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인용하려면 보통 헷갈리는 게 아니다. 상당한 전문지식 없이는 도리어 상대의 기나 살려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건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보통 사람들은 이것 하나만 제대로 알고 어디 가서 제대로 말할 수 있으면 된다는 거다. 전문가가 할 일이 있고 일반인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일반인용. 이 부분에서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댓글 중..

 

spark

그런데요 이 자료도 일본측에서 이미 다 알고 트집잡고 있는 내용입니다. 칙령에서 말한 석도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 바로 옆의 바위섬 관음도라는 얘기지요. 1906년 아직 한일 합방 전의 대한제국 황성신문 5월자에 "우리나라 섬인 독도는 외양 100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일본 관헌 일행이 자기들 땅이 되었으므로 시찰하러 왔다.." 라는 기사가 있는데 1906년 7월의 황성신문에는 "군 소재의 울릉도와 죽도, 석도는 동서60리, 남북 40리"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을 증거로 독도와 석도는 다른 섬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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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북방영토 한반도 3배 크기… 백두산 위치도..

국제관계 2012. 8. 26. 20:52

출처 뉴스 > 쿠키뉴스 2007-05-22 18:35

뉴스 : “잃어버린 북방영토 한반도 3배 크기… 백두산 위치도 조작됐다”

 

 

“잃어버린 북방영토 한반도 3배 크기… 백두산 위치도 조작됐다”

 


[쿠키 사회]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우리나라 역사왜곡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진짜 백두산(白頭山)은 지금의 백두산이 아닌 핑딩산(平頂山·1429m)이며 우리 선조가 잃어버린 북방영토의 넓이가 69만㎢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대한지적공사 조병현 지적재조사팀장은 22일 행정자치부 주최로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지적혁신엑스포에서 이같은 내용의 ‘우리나라 북방영토의 경계획정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고문서의 역사적 기록을 인공위성 영상으로 분석해 북방영토 경계를 획정하고 실제 넓이의 산출을 시도한 것은 처음이다.

북방영토란 우리 민족 삶의 터전이며 항일독립운동의 본거지였으나 과거 청나라와 일제에 의해 빼앗긴 연해주와 간도지역으로서 현재 중국과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는 땅이다.

보고서는 북방영토 경계를 랴오허강(요하)∼쑹화강∼핑딩산∼아무르강∼동해로 보았다. 동쪽 끝은 북위 52도9분13초·동경 141도32분41초, 서쪽 끝은 북위 38도54분20초·동경 121도5분9초, 남쪽 끝은 북위 33도9분50초·동경 126도16분14초, 북쪽 끝은 북위 53도20분56초·동경 119도50분59초다. 북방영토는 요하와 아무르강 이남지역으로 전체 면적은 간도지역(39만483㎢)과 연해주지역(30만6346㎢)을 포함해 69만6829㎢로 한반도의 3배, 남한의 7배 크기다. 전체 둘레는 6981㎞로 현재의 한반도와 비슷하다.

지금까지 북방영토 위치는 북위 41도55분에서 43도50분, 동경 128도8분에서 131도5분으로 현 백두산을 기점으로 서북으로는 노령산맥과 노야령산맥을 거쳐 훈춘을 포함하는 4만1000㎢로 알려졌다.

 

진짜 백두산은 핑딩산

보고서는 현재의 백두산은 평안도 묘향산으로 추정되며 실제 백두산은 중국 하얼빈 동북쪽 만주평야에 있는 핑딩산 일대라고 주장했다. 이 근거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서문과 만주원류고 지리지, 성종실록 등의 백두산 관련 기록을 들었다. 대동여지도 서문에서 백두산은 ‘큰 거친들 가운데 산이 있고 정상에 위치한 큰 못의 둘레가 80리, 높이는 200리, 가로길이가 1000리로 앞쪽이 무너졌다’고 기록돼 있다. 또 청나라 한림원에서 발간한 만주원류고 지리지 장백산편에는 ‘거친 들판 가운데 있는 산’이라는 설명이 있고 성종실록에는 ‘우리나라는 요수의 동쪽 장백산의 남쪽에 있어서…지역의 넒이가 만리나 된다’고 서술됐다.

인공위성 영상을 통해 분석한 결과 핑딩산은 만주벌판 한 가운데 위치해 있고 산 앞쪽 부분에 무너진 흔적이 있는데다 정산에는 둘레 80리 정도의 커다란 못이 있다. 하지만 현재의 백두산은 들녁 한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고 무너진 지역을 찾을 수 없다. 천지 둘레가 20리에도 못 미쳐 고서의 백두산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백두산 왜 바뀌었나

보고서는 일제식민지시대 일제가 반도사관을 위해 우리 고대사를 조작했고 ‘대륙의 조선’을 ‘한반도’로 옮겨 놨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보고서는 1910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고문서와 고지도 등 50여종 20만권이 서울 남산에서 소각됐고 대동여지도 역시 1930년 조선총독부의 검열도장을 찍어 공개된 점으로 미뤄볼 때 각색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 팀장은 “우리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정한다’고 규정, 북방영토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헌법 제 3조를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임시헌법 제3조에는 ‘대한민국의 강토는 구한국(대한제국)의 판도’라고 규정했고 1944년 임시헌장 2조에는 ‘대한민국의 강토는 대한의 고유한 판도’라고 정했다. 그러나 1948년 제헌의회에서 국제적 마찰을 우려해 부결됐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황일송 기자 ilso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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